땅과 흔들림 2

 

오늘날 시대의 단편이 되는 모습을 살펴, 과거의 시점 어느 때의 유사한 모습을 가늠해 보는 방법의 접근이 가능할 있습니다. 요즘의 세태에 논란에 있는 동성애의 모습과 시각을 통해 과거의 시점의 모습을 살펴 이해해 있지는 않는가 하고 살펴 보게 됩니다.

오늘날 존재하는 동성애자와 그들의 결혼에의 찬반의 여론이 있습니다. 시대적인 변화의 때에 맞추어 가능하다고 봅니다. 어느 정도 가능한 부분은 동성애자들의 모습간에도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입니다. 나름의 환경적 영향으로 인함과 일부의 유전적 변이로 인한 부류의 모습 그리고, 저들간에도 저질적인 부류와 온건한 부류가 나뉘어 존재할 것입니다. 온건한 부류의 지지에 대한 긍정의 모습으로서 결혼제도의 적용을 논함은 어느 정도 가능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들을 가운데 드러내어 살게 하려는 모습의 경우 어느 정도 수긍이 가기도 합니다. 이러한 동성애 성향 자들이 어제 오늘 근래의 일이 아닌 천년 전에도 여전히 존재 하였음을 성경의 기록에도 살펴 있습니다.그리고,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는 대표적으로 부정적인 모습이 각인되는 사건에의 기술이 되어 있음도 사실입니다. 당시 기록을 통해서 보건대, 부정적인 모습이 실제 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살펴 것은, 부정적 모습으로서 등장하는 당시 동성애자가 당시 존재하였을 모든 존재의 동성애 성향자 들을 대표한다고 있겠는가의 시각을 생각해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논쟁이 되는 선천적인 부분과 환경의 영향에 의하여, 사실 환경의 영향에 의한다 하여도, 동성애적 성향으로 귀결되는 사람인 경우, 본성과 좋은 것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속성상 해당부분에 육체적, 정신적 문제가 있을 있음의 가능성을 살펴 있습니다. 이는 또한 그러한 모습을 지향하는 삶일 밖에 없는 저들일 있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과거 당시에 창조주에 의해 보내진 천사라고 기록된 에게 어떤 불량배 수준의 사람들이 추근거리고, 무모함을 보였으며, 동성애적 모습을 포함한 성적 타락자로서 접근을 것에 대한 처벌로 해당 도시가 거의 전멸에 가까운 모습이 있었다는 기록을 당시 기록의 모습으로서 존재함과는 별도로, 불량 스러운 동성애자가 전적으로 동성애자인지, 동성과 이성의 혼합주의자인지, 모두를 포함하는 포악한 악한 행위를 즐기는 사람인지는 불구하고 당시 가해자들이 모든 지역을 대표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물론 그랬었을 수도 있습니다만. 물론 그럼에도 당시에는 그러한 결과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과거 수백년 전에 기독교의 대표격인 중세 시대 천주교의 천동설, 지동설에의 오류에 힘을 실어 주었던 모습과 근래 있었던 동성애 찬반 양론 등, 언제나 모두가 같은 결론을 지지하지는 않는 다는것 입니다. 과거에도 그러하고 오늘날에도 그러하 듯, 옳은쪽을 지지하던 쪽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물론 그때마다 적절히 회귀하는 모습도 보이긴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예수님의 복음의 시대를 통해 과거와 같은 모습을 지양하고 변화된 모습으로서 힘보다는, 힘이 아닌, 회개와 용서, 사랑으로 사람들을 대하라고 말씀 하심과 계속 되는 인간의 역사를 통해 존재해오게 되는 저들 성적 소수자들의 권익을 근래 어느 정도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목소리의 등장은 실제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면에는 성적 소수자들 가운데서도 나쁜 사람이 있는 반면에 좋고, 인류에 기여하는 인간의 모습으로서 동일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있을 수 있음 통하여 저들을 대하는 모습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시각이 요구된다는 것이고, 그러한 시대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더하여, 성적 소수자는 이례적인 모습으로서 허용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대중의 무분별한 혐오 내지는 추구를 자제하도록 사회적인 보완이 필요하다고 있습니다. 실제로 정상적이라고 불리우는 인간에게도 다양한 인간상이 존재합니다. 좋은 모습과 나쁜 모습에 지배적인 사람이 존재하듯, 그러한 면에서 성적 소수자인 동성애 성향자만을 뭐라고 있겠는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성적 소수자인 어떤 사람의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 가족 관념이 정상적인 사람의 수준 만큼에 이를 없다고 과연 있겠는지, 오히려 정상적인 사람의 성에 대한 이해와 사람, 가족에 대한 이해에 터무니 없는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음을 살펴 , 사실 '예수님의 말씀하신 바와 같이 눈의 들보를 빼고, 타인의 티를 내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심에 자신 있게 지탄할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지, 물론 그렇게 간략하게 말할 수는 없는 부분이 있을 있음을 압니다. 그러므로, 서로 공존이 가능한 사회적 인식이 필요한 때이고, 변화되어 세상에 적용 가능한 모습이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과거보다는 오늘날의 시대적 관점을 통해 관련 문제를 살피고, 이해하고 살아가려는 모습이 필요하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므로, 법적인 보호와 공식적인 대내외 인식을 위한 동성애 성향자의 결혼 제도를 통해 저들의 권리와 의무를 이행하게 하는 취지의 법제화도 세상의 모두가 아닌 일부의 사회 단면의 모습으로서 존재도 가능할 있는 부분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성경의 기록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함이라' 말씀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잠깐이라 해석이 않겠는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세상에 육체로 오셨었고, 육체의 기간에 좋은 말씀을 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에서도 '남자 쓰기를 여자와 같이 한다' 비난과 '저들의 하는 데로 놔두었다' 무관심적 관점의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당사자의 당시 심정의 견해와 실제하는 저들의 잘못된 사람들과 더불어 일부 선의의 선천적, 환경적 동성애 성향자들을 모두 포함하여 지탄하는 듯한 표현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도 그렇고 오늘날에도 그러하듯, 모든 사람이 똑같지는 않을 수 있다는 있습니다.

거주지역의 여부에 논의로서는, 미국의 경우를 예로 들어, 과거 흑인과 백인의 거주지 차별의 관점과는 다른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흑백 거주자의 주거 제한은 애당초 말도 되지 않는 차별일 있지만, 사람의 살아온 인습의 거부감을 어느 순간 부정해야 한다고도 생각지 않습니다. 시간이 필요한 일은 당연히 존재합니다. 그것을 무시했을 때는 다른 부작용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자신도 동성애 성향자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비난과 지탄의 관점이 컸음을 경험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해의 시각이 증대하게 됨으로써 이전 보다는 어느 정도 이해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동성애 성향자의 결혼 등의 제도를 옹호하는 교파가 있을 있으며, 거부하는 교파가 있을 있다고 여겨집니다. 모든 교파가 찬성해야 하고, 반대해야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방 사람, 이교도에 대하여도, 기독교 내의 이단 논쟁도 저들의 행위가 자신과 타인에게 위해롭지 않다면, 존중의 모습을 유지함이 옳다고 보입니다. 자신의 장단점과 잘잘못은 자신이 자각하여야 효과가 있다고 봅니다. 사실 상처와 좋은 것을 주고 받음은 어떠한 교회 , 종교, 단체, 사회, 가정에서도 상시 존재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다양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지역적으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올바른 지식에의 추구는 필요합니다. 인간이 본성인 여러 감정의 가짐과 표현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서로 존중하는 시각을 유지함도 필요합니다. 자신의 개인적 입장을 묻는다면, 저는 동성애 성향자 모습을 옹호 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저들의 존재를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에게 선량한 심성의 동성애 성향자가 있을 있으며, 치유가 필요한 사람이며, 저들의 삶을 존중해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가지게 됩니다. 창조주의 섭리가운데, 세상에 태어난 존재이고, 삶을 영위할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May 2015

 

그래도, 지구는 아직 건강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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